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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시조 이야기 5편 - 이고 진 저 늙은이

by 플라잉블루 20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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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우랴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2. 지은이 : 정철

정철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여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으로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의 아들입니다. 어려서 인종의 귀인인 큰 누이와 계림군유(桂林君瑠)의 부인이 된 둘째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명종)과 친숙해졌습니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맏형은 장류(杖流) 도중에 죽고 아버지는 유배당하였는데, 정철도 관북(關北), 정평(定平), 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1551년에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그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됩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같은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게 됩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고,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첫 벼슬은 사헌부지평, 이어 좌랑, 현감, 전적, 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이르러 정랑, 직강, 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가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해 이이(李珥)와 함께 사가독서하였습니다. 이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인 1575년(선조 8)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오게 됩니다. 이어 사간, 집의, 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1580년 45세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도승지, 예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48세때 예조판서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오릅니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게됩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고 파직,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진주와 강계로 이배되게됩니다.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게 됩니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送亭村)에 우거하다가 58세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합니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있습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있습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습니다. 전자는 1894년(고종31)에 간행한 것이 전하고,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 의성본(義城本), 관북본(關北本), 성주본(星州本), 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으나,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합니다.
또,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文清公遺詞)》가 있으며,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합니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清)입니다.

3. 말뜻

이고 진 :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진.
설워라커든 : 서럽다고 하겠거늘.

4. 감상

송강 정철의 '훈민가' 중의 '반백자불부대(늙은이는 지고 이지 않음)입니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진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저 늙은이, 그 짐을 벗어 나를 주시오.
나는 아직 젊었으므로 돌도 무겁지가 않습니다.
인생이 다 늙은 것만도 서러운 일인데, 게다가 무거운 짐까지 져서야 되겠습니까?

경로사상을 노래하며, 늙은것도 서러운데 무거운 짐을 지는 노인의 짐을 들어주며 나 또한 나이가 들면 저리 될 것이니, 노인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사는것이 어떻냐는 전형적인 유교 사상의 효를 강조하는 시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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